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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박헌영의 암투-[1]   10-08-15
관리자   1,350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6.25를 일으킨 후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戰勢)가 역전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둘의 갈등은 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작전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해온다는 소식이 들리던 10월 8일
평양 모란봉 지하 김일성 집무실을 방문한 중국대사 예지량의 목격담에 따르면 박헌영은 "즉각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김일성은 "남조선 산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언성을 높였다.

유엔군은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했다.


 
1950년 10월 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택동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 편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나란히 서명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갈등은 1950년 11월 7일 전화(戰禍)를 피해 압록강 연안 만포진에 설치되어 있던 임시 소련 대사관에서 열린 볼셰비키혁명 기념행사에서 폭발했다.

김일성은 전쟁이 열세로 몰리게 된 것에 대한 책임 공방을 벌이다가 박헌영에게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두 사람 모두 취한 상태였고, 서로 막말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험악했다. 전 동독 주재 북한대사이고, 당시 외무성 부상이던 박길용의 증언이다.

먼저 김일성이 소리쳤다. "당신이 들고 일어난다고 했던 빨치산들은 다 어디 간거야?"

박헌영이  "아니 어째서 낙동강에 군대를 죄다 내려보냈나"라고 반박하자 김일성은 흥분해 소리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출신 배경이 너무 달랐던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을 구성할 때부터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박헌영은 8·15 광복 당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일제 말기까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했던 박헌영이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의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반면 소련군 장교 출신인 김일성은 정체에 대한 시비가 분분했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박헌영을 제치고 북한 권력의 1인자 자리에 올랐다.
 
나이가 김일성보다 12살 많은 박헌영은 김일성이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기 10년 전인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했다.

공산주의 활동 경력에서 대선배였던 박헌영에게 김일성은 소련을 배경으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풋내기로 비쳤을 것이다.
 
한나산 10-08-16 20:44
답변  
원래 박헌영이 세력이 더 세가지고 김일성을 6.25책임을 물어 처단햇더라면 북한이 이 지경은 아닐텐데..ㅠㅠ
한반도도 통일 됐을 시구..ㅉㅉ

김일성과 박헌영의 암투-[2] 
6.25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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